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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내전에서 규범적인 평화로~엘살바도르의 근면한 국민들

같은 중미 지역인 코스타리카의 절반도 안 되는 국토지만 코스타리카 인구보다 많은 650만 명의 국민들이 사는 엘살바도르. 이곳은 중미 지역에서 인구 밀집도가 매우 높은 국가입니다. 좁은 지역에 사람이 빼곡 해서 절차탁마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국민성이 탄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라틴 사회는 긍정적이고 즉흥적인 부분이 많지만, ‘중미의 일본’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 사람들은 보기 드물게 차분하며 약속을 잘 지킵니다. 생산되는 커피 원두에서도 정갈한 성격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성실한 나머지 전쟁에도 진심이며 철저했습니다. 우파 정부에게 좌익 게릴라가 봉기하여 1992년까지 이어진 내전 시대 때는, 사람들이 적으로 간주되면 예외 없이 죽였습니다. 같은 내전이라도 니카라과는 적의 병사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엘살바도르는 고문하고 학대하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엘살바도르는 스페인어로 ‘구세주’를 의미하지만, 내전 시대의 이 나라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겨우 평화를 회복한 지금은 공포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타고난 성실함으로 빠르게 부흥을 꾀하고 있습니다.

공포의 내전 시대

내전이 격심했던 1980년대 중반에 엘살바도르를 2개월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 공항에서 차를 타고 시가지에 들어가는 길부터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가는 도중, 고속도로까지도 정부군과 게릴라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출발 전에 “머리를 창문 밑으로 내리고 도착할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해라”라고 했으며, 총격으로 유리가 산산조각나지 않도록 창문에 테이프가 붙어 있었습니다.

수도 중심부에는 20명 정도의 완전 무장 병사들이 대열을 짜고 무선으로 연락하면서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순회하는 군용 트럭의 짐칸에서는 많은 병사들이 자동소총으로 시민들을 겨눴습니다. 경찰차도 2대가 1팀이 되어 창문으로 자동소총을 내밀고 달렸습니다. 상공에는 위장 도색한 군 헬리콥터가 윙윙거리며 경계비행을 했습니다. 운전사는 “이게 일상이야”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습니다.

신문을 펼치면 거의 매일, 길 위에 널린 유기 시체들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얼굴을 칼로 파내는 잔혹한 고문을 받은 흔적도 있었습니다. 극우 군인이 조직한 ‘죽음의 부대(death squad)’라는 암살 집단의 짓이었습니다. 전선에 가기 위해 국방성에 찾아가, 정부군 중령에게 근황을 물었습니다. 격전지가 어디냐고 묻자, 벽 한 면을 차지한 지도 이곳저곳을 가리켰습니다. 거의 전 지역이었습니다. 주요 전투 시간대를 물어보니, ‘24시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부 방면 군사령관을 만날 수 있는 초대장을 받고 헤어질 때, 그는 “조심해서 가라. 죽지 않는다면 또 만나자”라고 미소 지었습니다. 3개월 후, 중령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암살된 시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살벌한 상황에도 시 중심부에는 쇼핑센터가 있었으며, 일본 전화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번화가 마켓도 채소와 과일 등 먹을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같은 내전이지만 니카라과와는 달리 물자는 풍부했습니다. 정부를 지원하는 미국에게서 원조 물자가 계속 들어온 것입니다. 치장한 여성들이 마치 뉴욕에 있는 것처럼 화려하게 쇼핑을 즐겼습니다. 때때로 멀리서 폭발음이 울렸지만, 곧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었으니까요.

Photo: Las Comitas. Armée salvadorienne. / ICRC

커피 전쟁

왜 이렇게 잔혹한 사회가 되었을까요? 이 나라의 커피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스페인에게서 독립했을 때, 레갈라도(Regalado) 가, 솔(Sol) 가 등 한정된 유력자와 부유한 대농장주들이 정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14가족(The Forteen Families)’이라고 불리는 특권 계급이 되어, 정치와 경제를 한 손에 장악했습니다. 실제로는 분가 등으로 늘어나 250가문이라고 하는데, 소수의 권력자가 대다수의 빈곤한 사람들을 지배한 것입니다.

빈부 격차가 이곳처럼 심한 사회도 보기 드물었습니다. 철조망이 쳐진 담장 안에는 대 호화 저택이 있으며, 자동소총을 든 경비원이 주위를 경계합니다. 저택 반대쪽에는 극빈층들의 작고 초라한 집들이 빼곡했으며 슬럼가가 있었습니다. 같은 국민인데도 이렇게까지 격차가 나는 거냐며 아연할 정도입니다. ‘14가족’에게 방대한 부를 가져다준 것이 바로 커피였습니다.

19세기가 끝나고, ‘14가족’들은 원주민들의 공유지를 빼앗았습니다. 토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그들의 커피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어, 강제적으로 일하게 했습니다. 참지 못한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탄압하기 위해 국가 정비대를 조직했습니다. 군대도 다른 나라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닌, 자국민 지배의 도구로 쓰였습니다. 총의 위협 하에, 2%의 주민들이 국토의 60%를 지배하는 비뚤어진 사회가 된 것입니다.

군의 힘이 세지고 1931년에 군사독재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다음해, 농민들이 괭이와 칼을 손에 들고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전원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살해된 원주민은 3만 명이 넘습니다. 이후, 50년에 걸쳐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졌습니다. 군부와 상류계급이 한패가 된 공포정치가 국민들을 위압한 것입니다.

‘14가족’의 부자들은 군부의 힘을 등에 업고 커피 농장에서 빈곤한 농민들에게 같은 급료로 일을 시킨 뒤 이익을 가로챘습니다. 총을 겨누니 조용히 일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성실한 국민들이 묵묵히 일했더니 품질 좋은 커피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가 되자 엘살바도르는 작은 나라임에도 세계 3위의 커피 생산국이 되었으며, 지금의 2배가 넘는 양의 커피를 생산했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억압된 국민들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1980년에 민중들과 함께 한 가톨릭 대주교가 극우 ‘죽음의 부대’에게 암살된 일을 계기로,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라는 좌익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내전으로 돌입한 것입니다.

게릴라가 제일 처음으로 대공세를 펼친 곳이 바로 커피 집적지이자 엘살바도르 제2의 도시인 산타 아나(Santa Ana)였습니다. 커피 출하를 중단하고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정부의 국제 신용을 실추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 마을에서 정부군의 예비대도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을 살해하고 중대 전원이 게릴라 측에 가담했습니다. 초기에는 게릴라가 우세했기에 혁명이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정부 측을 지원했기 때문에 양측의 힘이 대립했으며,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1984년에 이 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커피 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게릴라는 엘살바도르 최대의 커피 공장을 공격하고 수출용 커피 3,000포대를 불태웠습니다. 또한, 원두를 운반하는 트럭도 습격했습니다. 커피 피해만으로도 2,000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이대로라면 국가 경제가 붕괴할 거라고 정부가 우려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커피는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Photo: Suchitoto. Slogan sur un mur. / IC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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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종결과 모범적 평화

내전이 끝난 건 1992년의 일이었습니다. 코스타리카와 UN이 중개에 나서, 엘살바도르 정부와 게릴라는 평화 협정에 조인했습니다. 10년이 넘는 전쟁에 양측 모두 지쳤던 것입니다. ‘죽음의 부대’를 이끄는 극우 소령이 병사한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내전 동안 7만 5천 명이 사망했으며, 100만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발생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건, 원활하게 평화의 시대로 이행됐다는 점입니다. 보통 서로를 죽이게 되면 평화 합의 이후에도 으르렁거립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무척 자연스럽게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여기서도 온화한 국민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좌익 게릴라는 그 이름 그대로 정당이 되었습니다. 게릴라 사령관에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바로 57세의 살바도르 산체스(Salvador Sánchez) 씨였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에서 교원 조합의 대표가 되어 농촌에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으며, 5명의 게릴라 사령관 중 한 사람이 되어 12년 동안 산속에서 계속 싸웠습니다. 그리고 2000년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이후 2014년에 69세로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2019년까지 대통령직을 맡았습니다.

게릴라 중에는 무기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우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평화를 원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과거의 응어리를 버리자는 의견이 우세했습니다. 경찰을 해체하고 시민 경찰을 신설했으며, 게릴라 병사가 경관이 되었습니다. 정부군의 수를 8개월에 걸쳐 서서히 감소시켜 게릴라와 균형을 맞췄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룬 과정은 세계에서도 손꼽힙니다. 제일 성공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라고 산체스 씨는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민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2009년에는 FMLN이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습니다. 게릴라가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지만, 선거로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2019년에는 FMLN 출신의 나입 부켈레(Nayib Armando Bukele Ortez) 씨가 중도 우파로 입후보해, 38세로 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젊은 기업가이자 일본의 야마하 모터 판매 대리점의 오너였는데, 정권 발족 후 일본을 제일 처음 방문했습니다.

내전이 이어졌기 때문에 커피 생산율은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농업 경제의 대부분은 커피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금도 2만 5,000가구 이상이 커피를 생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부는 스페셜티 커피의 수출에 힘을 불어넣고 있으며, 옛 ‘커피 왕국’의 명성을 되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Photo: Nayib Bukele

지금도 남아있는 트라우마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진 않았습니다. 내전 시대에 벌어진 인권 침해 사건의 재판이 이어졌으며, 국민들의 마음의 대립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경제도 금방 회복되진 않을 것이며, 미국에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명 정도의 일본인들과 함께 엘살바도르를 방문해 게릴라의 근거지였던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전쟁으로 피난 간 마을 사람들이 돌아와 있었습니다. 정부군이 공습했던 흔적이 이곳저곳에 남아있었으며, 지뢰가 아직 묻혀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나무와 붉은 벽돌로 만든 단층 건물이 7, 8동 늘어선 곳은 학교입니다. 부흥 사업으로 제일 먼저 학교를 세운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전쟁과 빈곤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어른들도 교육받고 있습니다. 재활 치료 센터에서는 폭격이나 지뢰로 손발을 잃은 사람들이 기능 회복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게릴라 병사였던 23세의 아니발(Anibal) 씨는, 형제 9명 중 3명이 정부군에게 학살당했으며 4명이 게릴라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전쟁밖에 하지 않았다. 사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농민의 생활을 도운 건 40세의 수녀, 그라시엘라 데 가르시아(Graciela de Garcia) 씨였습니다. 그녀는 정부군에게 고문당한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굶어 죽거나 학살당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묘에 들어가야 처음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살아가며 평화의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라고 진심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커피 생산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일할 사람은 충분히 있으니, 마을에서 커피를 키워 훗날에는 수출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줄 단체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런 활동의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hoto: Près de Perquin. Bombe non explosée. / ICRC

가느다란 나무를 네 모퉁이에 세우고 그 위에 함석지붕을 얹었을 뿐인 변변치 않은 집회소에서 밤에 환영회가 열렸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으며 마을 사람들이 연극을 상연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는 농가에 정부군 병사 두 명이 난입해, 아버지를 게릴라라고 말하며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아들은 독학으로 공부해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나온 두 명의 병사에게, 자신이 그때의 아이라고 밝히고 법에 따라 판결을 하는 스토리였습니다. 법치국가에서는 폭력으로 복수하는 게 아닌, 법으로 복수하는 거라고 극을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집회소 밖에서는 병사와 경관이 자동소총을 손에 들고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직업을 잃은 전 정부군 병사가 강도가 되어 종종 마을을 습격했기 때문입니다. 순간, 갑자기 집회소의 전기가 꺼지더니, 주변이 암흑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차 싶어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내전 중에 정부군이 건물을 습격할 때는 먼저 전원을 끄고 문을 부순 뒤 자동소총을 난사했습니다. 몸이 이를 기억해 조건 반사처럼 반응했던 것입니다. 이윽고 불이 켜지자 맞은편에서 마찬가지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마을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다른 일본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재밌어했습니다.

엘살바도르에 때때로 취재하러 방문했을 뿐인 저조차도 트라우마를 갖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겠지요. 재활 치료 센터에는 정신장애 때문에 낮부터 벌벌 떨며 밤에는 갑자기 뛰쳐나가는 아이들이 150명이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폭격과 총격전의 공포가 마음에 새겨진 그들이 생활과 정신의 안정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원래의 질 좋은 커피 생산이 이를 위한 수단이 되면 좋겠다고 바랄 뿐입니다.

내전의 공포에서 헤어나와 가족이 살해당한 슬픔을 마음에 간직하고 오늘도 밭에서 일하며 정성껏 콩과 씨름하는 생산자들. 엘살바도르 커피의 이름을 보게 되면, 그들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조용히 커피를 맛보셨으면 좋겠습니다.

*Full-width Photo: These El Salvadoran FMLN guerrillas demobilized in Chalatenango, for the Peace Accords with the government in 1992. / scottmontreal

Photo: IC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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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odista internacional

Chihiro ITO

국제 저널리스트. 1949년생, 야마구치현 출신, 도쿄대 법학부 졸업. 학창 시절에 쿠바 사탕수수 수확 국제 봉사 참여, 도쿄대 ‘집시’ 조사 탐험가 대장으로 동유럽의 유랑민 ‘로마 민족’을 조사함. 74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상파울루 지국장, 바르셀로나 지국장, LA 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AERA’ 창간 편집부원으로 동유럽 혁명 현지 취재와 같이 주로 국제 문제를 보도했다. 2014년 9월에 퇴직. NGO ‘코스타리카 평화를 위한 모임’ 공동 대표. 지금까지 82개국의 현지 취재를 진행했다.
공식 홈페이지는 https://www.itochihiro.com/